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이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태평양회의(對太平洋會議)' 외교 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태평양 회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밀항하여 [[상해]]에 와 있었는데 [[1921년]] [[5월 20일]], 많은 임시정부 요인과 교포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국 기선 컬럼비아 호를 타고 [[필리핀]]의 [[마닐라]]를 거쳐 [[워싱턴]]으로 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는 파견된 대표단의 활동을 뒤에서 후원하였으며, [[뉴욕]]에서도 후원회가 조직되어 대표단의 외교 경비를 뒷받침해 주었다. 특히 뉴욕서 유학하던 [[조병옥]], [[허정]] 등의 청년 유학생들이 함께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155-160] || [youtube(qr0xTfVKUtE)] || ||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워싱턴 군축 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이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 || 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담(Washington Naval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오전 8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 도착하자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이승만을 인터뷰 하였다. 파테 뉴스(Pathe News)와 주간 국제뉴스(International News Weekly)가 금문교 공원에서 촬영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한국민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워싱턴으로 돌아왔으며, 회의가 미국 영토에서 열리기 때문에 파리 평화회의에서처럼 한국 대표들이 일본 외교관들에게 질식을 당하지는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David P. Fields 외 공편, 《Log Book : 이승만 일기》, 2015, 대한민국역사박물관, p. 111] || [[파일:koreancommission1921.png|width=100%]] || ||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를 위한 구미위원부 단체 사진. 앞줄 왼쪽 끝이 [[이승만]], 오른쪽부터 정한경, 프레드 돌프. ||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가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꾸리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 대표단이 공식적이라는 인상을 가능한 띄기 위하여 이승만의 평생의 [[독립운동]] 동지인 국제 [[통신사]]인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젊은 기자 [[J. 제롬 윌리암스]] 주선으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기자 회견]]을 열고 억압에 눌린 [[한국인]]들의 투쟁사를 설파하며 [[기자]]들을 통해 먼저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임시정부가 과연 한국민의 전체를 대표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 자들도 상당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공식 신임장을 전보로 요청하였고 [[1921년]] [[9월 29일]], 다음과 같은 신임장을 받게 되었다.[*a]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9월 25일]], 정식으로 전 각료의 특별 회의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음을 이에 밝히는 바이다. 즉,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군비 축소회의에 전권을 가질 한국 대표단을 다음과 같이 선정 임명한다.[br] >'''전권대사 이승만, 전권부사 [[서재필]], 비서관 [[정한경]], 고문관 [[프레드 A. 돌프]]'''[br] >전권 대사에게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며 대표 1명을 더 추가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대표단의 전 인원은 5명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본 군축 회의에 한국 문제에 관한 주장을 제의할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군축 회의에서 제기되는 모든 협정, 의정서, 조약 일체에 대한 협정 및 체결을 할 권한을 부여하는 바이다. 이 신임장을 미국 대표단의 단장인 허그스 [[국무장관]]과 군축 회의 사무국에 직접 제출하고 한국 대표단이 이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렇다할 아무런 회답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국 대표부는 [[옵저버]]로서라도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목표한 바는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법률 자문이었던 프레드 돌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논설이 [[1921년]] [[12월 1일]]자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결과만을 달성했다.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간의 과도한 군비경쟁 해소 및 이권 조정이 회의의 목적이였던만큼 그들의 [[식민지]]에 대한 [[독립]] 등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이 때 그는 이 회의가 끝나자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였다.[*a]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탈취할 수 있는대로 탈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통용될 때, [[강대국]]은 이해가 상반되는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정치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 결과가 [[전쟁]]을 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오직 이러한 현실에서 외면당한 [[약소국|약소 국민]]만이 그들의 정당한 주장조차 펴지 못하고 [[주권]]을 유린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회의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서구권]] [[강대국|열강]]에게 더이상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고, 마침 [[소련]] 주도로 [[공산주의]] 운동이 커지면서 좌익과 우익 분화를 촉진하는 영향을 끼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